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00
한자 金斗良
영어공식명칭 Gim Duryang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427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1년 11월 2일연표보기 - 김두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9일 - 김두량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41년 6월 12일연표보기 - 김두량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 - 김두량 대통령 표창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9일 - 김두량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427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월 9일 발생한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은 경상남도 지역 최초의 만세 운동이다. 연개장은 낙동강멸포 나루를 통하여 창녕 등 다른 지역과 연계되는 교통의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수천 군중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후 경상남도 지역으로 의거가 확산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3·1 운동 역사에 매우 의미가 깊다.

[가계]

김두량(金斗良)[1871~1941]은 1871년 11월 2일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서 태어났다. 아들로는 김순(金純)·김정(金晶)·김훈(金勳)·김력(金力)·김무(金茂)·김병조·김홍 등이 있고, 딸 김정희가 있다. 손자는 김양원, 김윤호, 김일우, 김순호, 김경호, 김의호, 김덕봉, 김현황이 있다.

[활동 사항]

민족 대표 이갑성(李甲成)은 배동석(裵東奭)을 통해 김세민(金世民)에게 서울의 동향과 독립 선언 계획을 알렸다. 김세민의 권유로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에서 14명이 서울의 3·1 운동과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3월 6일 밤 새말 예배당에서 김두량을 비롯한 28명이 모여 3월 9일 연개 장날에 만세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칠북면 이령리연개장터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9일 정오 연개 장터에서 김세민이 개회사를 하고, 유광도가 격려 연설을 한 후 김정오(金正悟)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후 지역 유지들과 경명 학교 학생들이 선두에 서고, 수천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해가 질 무렵 해산하였다. 연개장은 교통의 중심지이어서 수천 군중이 동원될 수 있었다. 또한 칠원 경찰 주재소와 거리가 멀고 거사까지 비밀이 잘 유지되어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났다. 일본 경찰은 다음 날에야 정보를 입수하고 조사를 시작하였으나 연행자는 모두 훈방되었다.

칠북면 이령리 연개 장터 만세 운동은 경상남도 지역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칠북면 이령리연개장터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3월 12일], 영산·밀양·통영 의거[3월 13일], 의령 의거[3월 14일], 신반 의거[3월 15일], 지정 의거[3월 16일], 칠곡 의거[3월 17일], 진주 정촌·삼가 의거[3월 18일], 함안·합천 의거[3월 19일], 군북·대병·구만 의거[3월 20일]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본 총독부는 3·1 운동 후에 연개장을 폐쇄하고 가게를 헐어 버렸다.

김두량은 주민들을 규합하여 친일 분자 칠원 면장 김보한(金寶漢)의 집을 습격하여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주모자로 취급되었으며 같은 해 5월 8일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형기를 마친 후에도 식민 정책에 저항하였고, 창씨 개명을 반대하다가 주재소에 호출되기도 하였다. 부득이 창씨 개명을 할 때 아들들의 이름을 순·정·훈·력·무 등의 외자로 고쳤는데 ‘순수[純]하고 밝은[晶] 나라 찾는 공훈[勳]을 세우하면 힘[力]을 길러 나라를 번성[茂]하게 하여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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