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683
한자 孝子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김광철

[정의]

전통 시대에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효성으로 어버이를 잘 섬긴 자녀.

[개설]

효자는 부모를 극진히 섬겼거나 각종 형태의 효행이 알려진 인물이다. 효(孝)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것 등을 포함한다. 전통 시대에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효행을 실천한 효자는 각종 지리서에서 함안군 44명, 칠원현 9명 등 총 53명 정도가 확인된다. 이들 효자들이 행한 효행의 유형은 크게 보면 부모 봉양, 극진한 상제례 실천, 효행 평가 등 셋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부모 봉양의 경우는 다시 지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거나, 단지(斷指) 등의 방법으로 부모의 병 치료, 부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례가 있다. 상제례의 극진한 실천 유형도 삼년상 이상의 복상과 여묘, 조상 묘 훼손 방지를 위한 희생 등의 사례가 있다. 효자들 가운데는 지성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상장례를 잘 치루는 등 효행 유형이 겹치는 경우도 많았다.

[함안의 효자와 그 유형]

전통 시대 함안에서 효행을 보인 인물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효자 다물(多勿)과 이교(李郊) 두 명만 소개한 이래, 『함주지(咸州誌)』[1587]는 「선행(善行)」과 「견행(見行)」조에서 이들을 비롯해 25명을 소개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효자」조에 14명을 소개하여 『함주지』보다 그 수가 줄어들었다.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에 포함된 『함안군 읍지』[1832]는 「선행」조에서 37명의 효행 인물을 소개하였으며, 『영남 읍지(嶺南邑誌)』에 포함된 『함안군 읍지』[1871] 「효자」조에는 26명으로, 1899년 간행된 『함안군 읍지』에서는 14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 지리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함안의 효행 인물은 모두 44명에 이른다.

칠원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효자 송한문(宋漢文)과 강계흠(康季欽) 두 명을 소개하였다. 『여지도서』에서는 여기에 주각(周珏), 강덕보(姜德溥), 박만지(朴萬枝) 등 3명을 추가하였다. 『경상도 읍지』에 포함된 『칠원현 읍지』[1832]는 여기에 김승락(金承樂)과 김세한(金世漢) 2명을 추가하여 모두 7명을 소개하였고, 『영남 읍지』 중의 『칠원현 읍지』[1871]는 여기에 임난상(林蘭祥)과 최신광(崔信光)을 더하여 모두 9명을 수록하고 있으며, 『칠원군 읍지』[1899]도 이와 같이 9명을 소개하였다. 각종 지리서에 수록된 함안 지역의 효자는 함안군 44명, 칠원현 9명 등 모두 53명이 확인된다. 이들 효자들의 신분을 보면 사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지만, 정병이나 수군(水軍) 등 군인이 7명, 역리와 백정이 각각 1명, 노비도 6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효행의 유형별로 해당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거나 형제간 우애를 지킨 경우는 박구(朴球)[박한주(朴漢柱)의 증손], 전의필(田義弼)[수군], 세걸(世乞)[사노비], 강계흠, 최신광 등 5명이다. 단지 등의 방법으로 부모 형제의 병을 치료한 경우는 다물[사노비], 이숭(李嵩)[이거인(李居仁)의 아들], 이희(李僖)[현감 이순조(李順祖)의 손], 심린(沈麟)[교생(校生)], 박종성(朴宗誠)[보인(保人): 조선 시대 군(軍)에 직접 복무하지 아니하던 병역 의무자], 박몽길(朴夢吉)[보인], 이원좌(李元佐), 한극검(韓克儉), 조희옥(趙希玉), 이후삼(李垕森), 이희(李檥)[교생], 이희현(李希賢)[교생], 강준노(姜俊老), 박황(朴潢), 송한문, 강계흠, 박만지, 김세한, 임난상 등 19명이다.

부모 형제를 살리고 자신이 희생한 사례는 응금(應今)[사원 노비], 안신갑(安信甲) 등 2명이다. 응금은 사원 노비로서 강도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다시 어머니를 죽이려 하자 자신이 어머니를 감싸안고 대신 칼에 찔려 죽었다. 안신갑은 아버지가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자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참전했다가 정유재란 때 산음에서 순절하였다. 3년상 이상 복상과 여묘를 모신 경우는 이교[이주남(李周南)의 아들], 이원성(李元盛)[이교의 아들], 하제(河濟), 이희필(李喜弼)[이희련(李喜連)의 아우], 박중남(朴仲男)[갑사(甲士)], 한수(韓壽)[보인], 안세관(安世寬)[주부(主簿)], 박형룡(朴亨龍), 배여경(裵汝慶), 안옥(安鈺), 안형(安亨)[정병(正兵)], 이천(李千)[사원 노비], 조효철(趙孝哲)[역리], 유석(劉石)[백정], 노적(露積)[사노비], 박성장(朴成長)[정병] 등 16명이다.

조상의 묘를 훼손 방지한 경우는 조준남(趙俊男), 김승락 등 2명이다. 조준남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증조할아버지 조참의 묘를 훼손하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자결했으며, 김승락은 아버지 상 때 화재가 발생하여 불이 빈소까지 번지자 아버지 시신이 있는 관을 감싸안아 불타는 것을 막았다. 효성이 지극하다고 평가받은 사례는 안관(安灌), 박희삼(朴希參), 이경무(李景茂)[이후경(李厚慶)의 문하], 안성흥(安聖興), 응련(應連)[사노비], 조익성(趙益城), 안상의(安尙義)[안황(安璜)의 증손], 주각, 강덕보 등 9명이다. 이 사례는 효행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효성이 지극했다', '효행이 특별했다' 등으로 표현된 경우이다.

효자로 평가 받은 경우, 그 정도에 따라 정려(旌閭)가 내려지기도 하고, 복호(復戶)나 증직(贈職)되기도 하였다. 정려가 내려진 인물로는 다물, 이교, 조준남, 이숭, 안신갑, 한극검, 이후삼, 응금, 응련, 송한문, 강계흠, 김승락 등 12명이 확인된다. 복호된 인물로는 안옥, 조희옥, 조효철, 안상의, 김세한 등 5명이다. 박형룡과 안성흥, 주각은 지평(持平)으로, 배여경은 호조 좌랑으로, 강덕보는 참의(參議)로 증직되었다.

[함안 지역 효자들]

함안 지역 효자 53명의 효행 내용을 모두 소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지도서』에 수록된 함안군 효자 14명과 칠원현 효자 5명을 중심으로 그 효행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여지도서』에 수록된 함안군 효자 14명

1) 다물: 사노비로, 안인리(安仁里)에 살았다. 아버지가 악질(惡疾)에 걸렸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타 들게 하여 효과를 보았다. 1507년(중종 2)에 정려하였다.

2) 이교: 본관은 인천이며, 자(字)는 동야(東野), 아버지는 생원 이주남이다. 평광리(平廣里)에 살았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아버지가 죽자 상례와 장례의 예를 다하였다. 그 뒤에 조모 상을 입자, 또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무덤에서 어머니 있는 집까지 6㎞쯤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전(奠)[간단히 술과 과일을 차려 놓는 예식]을 올리고, 거두면 곧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1518년(중종 13), 벼슬에 서용(敍用)[죄를 지어 면관되었던 사람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함]되었다.

3) 조준남: 효행으로 참봉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 때 증조할아버지 조참(趙參)의 묘가 왜적에 의해 파헤쳐지자 조준남이 적 중에 들어가 관을 감싸안으니, 왜적들도 의롭다 하고 감히 해치지는 못했다. 조준남은 울면서 왜적들에게, "너희가 우리 종묘사직을 뒤엎고 우리 무덤을 파헤쳤으니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어찌 너희를 따라 구차하게 살겠는가?"라고 꾸짖고 북향하여 재배한 후 자결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4) 안신갑: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용맹스럽고 절개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왜적에게 살해되자, 아버지 복수를 각오하고 왜장을 죽여 그 머리를 부술 것이라 다짐하며 전쟁터에 나갔다. 정유재란 때 산음(山陰) 전투에 참여하여 분투했으나 지원군이 없어 위기에 처하자 못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조정에 이 사실이 알려져 선조가 교서를 내려 정려하고, 판결사(判決事)로 추증하였다.

5) 이숭: 절도사 이거인의 서자로,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약으로 먹여 병이 낫게 하였다. 이에 정려를 내렸다.

6) 응금: 사찰의 노비로 강도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마저 칼로 죽이려 하자 몸으로 어머니를 덮어 대신 칼을 맞고 죽었다. 어머니는 살아났다. 이에 나라에서 정려하였다.

7) 한극검: 효성이 지극하여 상 중에는 예를 다하였고, 제사 지내기 전에 7일 간 몸조심하는 등 경건하게 제사를 주관하였다. 비바람이나 병들어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나가 예를 올리는 한편, 국상을 당해서도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주부로 증직되고, 정려를 받았다.

8) 응련: 사원 노비인데,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를 받았다.

9) 배여경: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 상에는 3년 동안 죽을 먹었고, 부친 상에는 3년 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초하루와 보름마다 성묘하고, 국상을 당했을 때 3년 간 심상(心喪)[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하기도 했다. 숙종 때 호조 좌랑으로 증직되었다.

10) 박형룡: 호는 완석당(浣石堂)으로 어버이 섬기는 것은 모두 『소학(小學)』을 따랐으며, 병들면 기도를 올리고, 상을 당해서는 죽을 먹고 여묘하였다. 효종과 현종이 승하했을 때 모두 소식(蔬食)[채소 반찬뿐인 밥을 먹음]했으며, 대비와 중전의 상에도 이같이 하였다. 지평으로 증직되었다.

11) 안옥: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상복을 입지 못했는데, 아버지 상을 당하여 3년 간 여묘한 후, 다시 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평생 소복으로 지냈다.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었는데, 안옥이 병들자 두 딸은 어렸고 장녀가 조금 커서 손가락을 베어 입을 적셨더니 효험이 있었다. 처가 병이 들었을 때 장녀는 출가해서 남은 두 딸이 다투어 손가락을 자르려 할 정도로 아버지의 효성을 본받았다고 한다. 복호를 받았다.

12) 조희옥: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리자 마치 나이 든 사람처럼 지성으로 아버지 병을 치료하였다. 장성해서 아침저녁 문안 인사를 거르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이에 복호를 받았다.

13) 조효철: 역리(驛吏)로, 부모상에 모두 죽을 먹었고, 국상에도 복을 입었다. 이에 복호를 받았다.

14) 안성흥: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였다. 사헌부 지평으로 증직되었다.

2. 『여지도서』에 수록된 칠원현 효자 5명

1) 송한문: 고려 때 사람으로, 어머니가 미친병에 걸리자, 오른손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약으로 먹였더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이에 정문(旌門)되었다.

2) 강계흠: 아버지를 정성껏 섬겼다. 일찍이 부역 때문에 서울로 갔는데, 멀리 떠나 있는 동안 뜻밖의 연고라도 있을까 염려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 그의 첩이 아버지에게 공손하지 못하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쫓아버렸다. 돌아오는 도중에 아버지가 편안하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고기를 먹었다. 아버지가 병중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강계흠이 물가에서 울부짖다가 잉어가 노는 것을 보고 작살로 잡아서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가 죽자 여묘살이를 하였고, 3년상을 마친 다음에도 묘 옆에 집을 짓고 또 3년을 살았다.

3) 주각: 호는 경재(敬齋)로, 효행이 특별하였다. 조정에 이 사실이 알려져 지평으로 증직되었다.

4) 강덕보: 진양인으로, 자는 성원(聖源), 호는 용재(慵齋)이다. 효행이 특별하고 학문이 완숙하여 조정에서 이조 참의로 증직하였다.

5) 박만지: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으로 써서 더 살게 하였다. 상을 당하자 3년 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경종 조에 포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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