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윤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679
한자 咸安 尹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집필자 류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고려 원종조
분관|분종 시기/일시 고려 명종 - 파평 윤씨에서 남원 윤씨로 분관: 윤위(尹威)
분관|분종 시기/일시 고려 원종 - 남원 윤씨에서 함안 윤씨로 분관: 윤돈(尹敦)
본관 함안(咸安) - 경상남도 함안군
묘소|세장지 윤돈 묘소 -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 기슭
성씨 시조 윤돈(尹敦)

[정의]

윤돈을 시조로 하고 함안을 본관으로 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토착 세거 성씨.

[개설]

함안 윤씨의 시조는 고려원종(元宗) 때 함안백(咸安伯)에 봉해진 윤돈(尹敦)이다. 큰 아들 윤희보(尹希甫)가 함안에 정착한 후 그의 후손들이 윤돈을 시조로 삼고 함안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연원]

함안 윤씨의 시조 윤돈의 할아버지는 윤위(尹威)이다.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尹莘達)의 7세손이며, 문숙공(文肅公)윤관(尹瓘)[?∼1111] 장군의 증손자이다. 윤위는 고려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박사·예빈소경(禮賓少卿) 등을 지내고, 1200년(신종 3)에 안렴사가 되어 남원에서 일어난 복기남(卜奇男)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남원백에 봉해지자 직손들이 남원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파평에서 남원으로 분관하였다.

윤위의 손자 윤돈은 고려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의정랑(典儀正郞)을 거쳐 이부시랑(吏府侍郞)에 올랐다. 그 후 함안에서 일어난 도적들의 반란을 원만하게 수습한 공으로 함안백에 봉해지고,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에 올랐으며, 충열왕 때 시중에 이르렀다. 윤돈에게 아들 4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아들 주부공(主簿公)윤희보는 본관을 함안으로 하고, 나머지 3형제는 남원 윤씨를 그대로 이었다. 이후 윤희보의 아들 윤기(尹頎)는 의랑을 지냈으며, 손자로 제학(提學)을 지낸 윤희(尹禧)와 상시(常侍)를 지낸 윤당(尹禟) 형제가 가문을 중흥시켰다. 윤희의 아들 윤득룡(尹得龍)은 조선조에 들어 호조 판서를 역임했고, 윤당의 아들 윤덕린(尹德麟)은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1337∼1392]와 동방(同榜)으로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올랐다.

윤희의 증손자인 윤기견(尹起畎)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때 집현전 부교리로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조 즉위 후 원종 이등 공신에 녹훈되고 판봉상시사에 이르렀다. 연산군 즉위 후 부원군에 추봉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삭탈관직되었다. 『국조 문과 방목』 등에는 윤기무(尹起畝)로 되어 있으나 『함안 윤씨 세보』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이름이 윤기견으로 되어 있다.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尹氏)[ ?~1482]는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다. 성종의 원비(元妃) 공혜(恭惠) 왕후 한씨 사후 1476년(성종 7)에 중궁으로 봉해졌다가 1479년 음력 6월 2일에 폐위되었다.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과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들어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昭惠) 왕후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월 16일 사약을 받아 사사되었다. 후일 연산군이 제헌(齊憲) 왕후라 추숭하고 묘는 회릉(懷陵)이라 하였으나, 중종반정 후에 원상 복귀되었다. 폐비 윤씨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元新洞)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충민공(忠愍公) 윤각(尹慤)[1665∼1724]은 숙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면서 청나라 사신과 함께 백두산의 경계를 조사하여 확정하고 그 지형을 그려 올렸다. 병조 참판과 삼도 수군통제사를 거쳐 총융사(摠戎使)를 지냈으나, 1721년(경종 1) 신축옥사(辛丑獄事)에 관련되어 장살(杖殺)되었다. 영조 즉위 후 신원(伸寃)되자, 아내 김씨는 "내가 진작 죽지 않은 것은 오직 하늘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말하고 마침내 단식하여 목숨을 끊었다. 영조가 그 절개를 표창하였으며, 윤각에게는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이외 태조 때 윤득룡의 아들 윤정(尹定), 선조 때 윤의(尹顗), 효종 때 윤수두(尹壽斗), 경종 때 윤지(尹志), 영조 때 윤약연(尹若淵)이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조선 후기 무과에 급제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낸 윤의검(尹義儉)과 윤태연(尹泰淵)도 가문의 명예를 더하였다.

[입향 경위]

고려 제24대 원종(元宗)[재위 1259~1274] 때 함안에서 도적들이 난을 일으키자 윤돈을 군사(郡事)로 봉하여 난을 평정토록 하였다. 윤돈은 난을 평정한 공으로 수문전 태학사와 시중에 오르고 함안백에 봉해지자, 이에 가솔들을 거느리고 함안으로 이거하였다. 그 후 큰 아들 윤희보가 정착하여 본관을 함안으로 삼았으며, 윤돈을 함안용화산(龍華山) 기슭에 안장하였다.

[현황]

2000년도 통계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함안 윤씨는 총 1,784가구에 5,783명으로 조사되었다. 서울과 경기도에 약 2,470명, 광주광역시에 86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경상남도에는 49가구에 150명이 거주하는데, 함안에는 단 2가구에 5명이 살고 있다.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가 편찬한 『함주지(咸州誌)』에는 함안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함안 윤씨가 있다는 기록 외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함안 윤씨 세보』상에도 시조 윤돈과 윤희보 이후 함안과 관련된 기록이 전무하다. 윤희보의 아들과 손자들이 조정에 연이어 출사하면서 서울 지역으로 완전 이거해 간 것으로 추측된다.

[관련 유적]

윤돈의 묘는 처음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용화산 아래 있었으나 후에 실묘(失墓)하였다. 2007년에 후손들이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에 시조 윤돈부터 8세 참판공 윤구(尹遘)까지 제단을 세워 매년 제사를 받들고 있다. 현재 함안에 남아 있는 유적은 전무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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