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306
한자 代山面 平林里 萬歲 運動
영어공식명칭 Dasanmyeon Pyonglimnijangteo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대산면 평림 장날 의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2일연표보기 - 제1차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7일 - 제2차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시작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권영수|최말종|김성근|안효중|최갑률|김용태|문덕중|김석규

[정의]

1919년 3월 12일과 17일 2회에 걸쳐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함안의 3·1 운동은 경상남도 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의 규모와 만세 운동 횟수에서 최대 규모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월 9일 칠북면연개 장터 만세 운동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경상남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3·1 운동이었다. 이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만세 운동,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이어서 3월 23일과 4월 3일·8일·1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함안에서 3·1 운동은 34일간 연속적으로 모두 11회, 1만 2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 운동이었다. 그 결과 삼남(三南)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를 낳았으며 일본 군경에 의한 피해 또한 전국 1위였다. 이를 통해 함안에서 3·1 운동이 매우 격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배경]

대산면 하기리는 일찍부터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곳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 지도자인 권영수(權英洙), 최말종(崔末鍾) 등은 칠북면 연개에 있었던 새말 교회로부터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을 통보받는다. 이에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던 권영수와 최말종은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대산면으로 돌아왔는데 그 날 오후 지역 유지와 기독교인들에게 연락하여 밤늦게 하기리 교회에서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다. 당시 모임에 참가한 권영수·최말종·김성근(金聖根)·안효중(安孝中)·최갑률(崔甲律)·김용태(金容泰)·문덕중(文德中)·김석규(金錫圭) 등은 3월 12일 평림 장날에 의거할 것을 결의, 그날 밤부터 대산면평림 교회와 하기리 교회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평림 장날 의거를 계획하였다.

[경과]

만세 운동을 계획한 지도부는 1919년 3월 12일 정오 대산면평림 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권영수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만세 운동은 비교적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는데 만세 운동에 참가한 군중이 해산할 무렵 현장에 출동한 일본 경찰들에 의해 시위를 주동한 권영수와 김성근 등이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17일 제2차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제2차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안효중·최갑률·김용태·문덕중·김석규·최말종 등이 재차 앞장서 일으킨 만세 운동으로 수백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제1차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 때 검거된 권영수와 김성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던 안효중이 추가로 검거되면서 만세 운동은 중단되었다.

[결과]

제1차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과 제2차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던 최갑률은 3월 19일 함안 읍내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학생들의 시위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학교 유리창에 돌을 던지게 되는데 이로 인해 기물 파손 죄로 징역 1년, 문덕중은 경찰 주재소와 등기소에 돌을 던져 기물 파손 죄로 징역 1년 등을 각각 선고 받았다. 이외 제1차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과 제2차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던 김성근과 안효중 등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권영수 역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각각 선고 받고 마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9일 발생한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대산면 평림리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2일 제1차 만세 운동부터 3월 17일 제2차 만세 운동까지 면(面) 차원에서 두 번씩이나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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