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291
한자 李芳實
영어공식명칭 I Bangsil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54년 - 이방실 대호군으로 승진
활동 시기/일시 1354년 6월 - 이방실 최영 등과 함께 원나라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병으로 참여
활동 시기/일시 1358년 - 이방실 왜구가 교동을 침범하자 서경 군민 만호 부만호 경천흥의 편비 맡음
활동 시기/일시 1359년 12월 - 이방실 철주에서 홍건적 격퇴
활동 시기/일시 1360년 1월 - 이방실 상장군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60년 2월 - 이방실 상만호가 되어 홍건적 격퇴
활동 시기/일시 1360년 4월 - 이방실 풍주에서 홍건적 격퇴
활동 시기/일시 1360년 - 이방실 추성 협보 공신에 봉해지고 추밀원 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61년 10월 - 이방실 이여경을 절령에 파견하여 목책을 쌓게 함
활동 시기/일시 1361년 11월 - 이방실 홍건적 격퇴
몰년 시기/일시 1362년연표보기 - 이방실 사망
출생지 함안군 - 경상남도 함안군
묘소|단소 이방실 묘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 81번지
성격 무신
성별
본관 함안
대표 관직 추밀원 부사

[정의]

고려 후기 함안 출신의 무신.

[개설]

이방실(李芳實)[? ~ 1362]은 고려공민왕 대 무신으로 대호군, 추밀원 부사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의 제1차 침입에서 홍건적을 격퇴하여 공을 세웠고, 1361년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었으나 총병관(摠兵官)인 정세운(鄭世雲)·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 등과 함께 20만 대병으로 적을 대파하고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간신 김용(金鎔)의 간계로 정세운 이하 대공을 세운 장군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이원(李源)이다. 부인은 진양 부인(晋陽夫人) 진주 강씨(晋州姜氏)와 정부인(貞夫人) 영산 신씨(靈山辛氏)가 있다. 아들은 이중문(李中文)이다.

[활동 사항]

이방실은 충목왕(忠穆王)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왕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곧 호군(護軍)으로 승진하고 토지 100결을 하사받았다. 1354년(공민왕 3)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하였는데, 선성(宣城)의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방실이 용주(龍州)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바로 노연상의 집에 들어가서 그 부자를 찔러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서울에 보냈다. 같은 해 6월 원나라 승상 톡토[脫脫]가 남쪽의 장사성(張士誠)이 일으킨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여기에 최영(崔瑩) 등과 함께 이방실도 포함되었다. 1358년(공민왕 7) 왜구가 교동을 침범하자 개경에 계엄령이 내리면서 서경 군민 만호 부만호(西京軍民萬戶府萬戶)로 임명된 경천흥(慶千興)의 편비(偏裨)를 맡았다.

1359년 12월 모거경(毛居敬) 등이 거느린 홍건적이 4만 병력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 등을 함락한 뒤 인주에서 웅거하자, 이방실은 안우(安祐) 등과 함께 철주(鐵州)에서 이를 격퇴시켰다. 이듬해 1월 상장군이 되어 다시 철화(鐵化)에서 전투를 벌여 100여 급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곧 상만호(上萬戶)가 되어 2월 안우 등과 함께 홍건적을 추격하여 고선주(古宣州)에서 수백 명의 목을 베니 살아남은 적 30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였다. 같은 해 4월에도 이 홍건적이 배 70척으로 서해도에 침입했을 때 풍주(豐州)에서 물리쳐 30여 급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이방실은 추성 협보 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 부사에 올랐으며, 예물로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을 하사받았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평장(平章)인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이 홍건적 10여 만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 등지에 쳐들어오자 추밀원 부사로서 서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동지추밀원사 이여경(李餘慶)을 절령(岊嶺)에 파견하여 목책을 쌓게 하였다. 11월 홍건적이 무주(撫州)에 주둔하였는데, 이방실은 아군의 수가 워낙 적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거두어 후퇴하면서, 순주(順州)·은주(殷州)·성주(成州)의 3주와 양암현(陽岩縣)·수덕현(樹德縣)·강동현(江東縣)·삼등현(三登縣)·상원현(祥原縣)의 5현 백성과 곡식을 절령 목책으로 옮겼다. 이 달에 이방실은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좌승(左丞) 유계조(柳繼祖), 대장군(大將軍) 최준(崔準) 등을 보내어 박주(博州)에서 적을 격파하였고, 지휘사(指揮使) 김경제(金景磾)와 함께 개주(价州)에서 적을 공격하여 15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기병 100기(騎)로 연주(延州)에서 적 1,000여 명을 공격하여 20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안주(安州)에서 홍건적의 습격을 당해 고려군은 패하고 상장군 이음과 조천주도 전사하였으며 김경제는 사로잡혔다. 홍건적이 개경을 압박해 오자 공민왕은 남쪽으로 파천할 생각을 굳혔고, 김용·안우·이방실·최영 등의 만류에도 그해 11월 19일 개경을 떠나 복주(福州)[안동]로 향하였다. 24일에 개경은 홍건적에게 함락되었다.

이듬해인 1362년 1월 17일 안우·이방실·김득배 등이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 교외의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다.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이 진군을 명령하자 여러 장수가 개경을 포위하고, 18일에 사면에서 총공격하여 개경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총병관 정세운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용이 정세운을 제거하고 그 죄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안우·이방실에게 정세운을 죽이도록 부추겨 살해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세운을 죽인 김용이 2월 29일 행재소로 온 안우를 목인길을 시켜 죽인 뒤,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만호 박춘(朴椿), 김유(金庾), 정지상(鄭之祥) 등을 보내 이방실마저 체포 살해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81번지에 있으며, 1972년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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