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남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262
한자 高句麗 南征
이칭/별칭 신라 구원 전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400년연표보기 - 고구려가 신라에 구원군을 파견
종결 시기/일시 400년연표보기 - 고구려 구원군이 왜를 신라에서 축출
발단 시기/일시 399년 - 왜가 신라에 침입하자 신라가 구원군 요청

[정의]

400년 광개토 대왕 때 고구려의 5만 군대가 김해 지역까지 진출한 사건.

[역사적 배경]

400년에 일어난 고구려 남정(南征)을 흔히들 고구려의 신라 구원 전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전쟁은 신라 구원 전쟁에 그친 것이라기보다는 가야 사회 변화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사건이었다.

고구려가 4세기 초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축출한 이후 두 군이 가지고 있던 상업적 이익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일어난 고구려-백제 두 나라 사이의 대립과 갈등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4세기 중후반에는 백제가 우위에 있었다. 즉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고구려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키고 승리하면서 낙랑과 대방 지역을 선점하였다. 하지만 광개토 대왕(廣開土大王)이 즉위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먼저 백제로부터 옛 대방 지역을 빼앗고, 그 다음 신라를 우군으로 삼아 가야 지역을 매개로 한 왜와의 교역권마저 빼앗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 남정은 가야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5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운명을 걸었던 대결전이었다. 고구려가 남정을 한 것은 신라를 구원한 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경과]

399년 왜(倭)가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 정부가 고구려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400년 고구려광개토 대왕이 5만 명의 기병과 보병을 신라 지역에 보내어 왜군을 축출하고 신라를 구원한 전쟁이 광개토 대왕에 의한 고구려 남정이다. 고구려 구원군이 왜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 지역으로 쫓겨난 왜를 가락국까지 진출하여 축출함으로써 왜의 축출 뿐만 아니라 가락국이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라가야(阿羅伽倻), 대가야(大伽倻)가 가야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여태껏 400년의 전쟁을 고구려-신라의 연합군과 백제-가야-왜 연합 간의 전쟁이라 이해하여 왔다. 이러한 입장은 가야 제국이 김해가락국(駕洛國)을 중심으로 연맹체 관계에 있었고 연맹체의 맹주국이던 임나가라 즉 가락국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으므로 가야 지역의 모든 나라들이 백제-왜의 연합군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고구려의 가야 지역 침략 이후 김해의 가락국인 임나가라는 전쟁에서 패배하였지만 아라가야(阿羅伽倻) 즉 안라국은 전쟁 이후 오히려 정치적 성장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라가야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가락국이나 왜와 연합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에 동조하였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이라는 기록이 세 차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쟁에 참여한 것은 확실하므로 아라가야는 고구려-신라의 연합군 측에 동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함안의 아라가야는 고구려의 가야 지역 진출 과정에서 고구려에 동조함으로써 획기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대형 덧널무덤이 등장할 수 있었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여 주는 철제 무기류들이 부장될 수 있었다. 자세한 연구 결과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단언할 수 없지만 마갑총의 마갑 또한 고구려의 고분 벽화[동수묘, 삼실총, 쌍영총 등]에 보이는 마갑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결과]

고구려 남정으로 인하여 가야 사회 내부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이 임나가라, 즉 김해 지역의 가락국을 정벌한 전쟁은 가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첫째, 전쟁으로 인하여 가락국이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이를 계기로 낙동강의 동쪽 지역인 경상북도 성주, 밀양, 부산 동래, 양산 지역이 신라의 영역권으로 편입되고 낙동강 하구의 주요 세력이 궤멸됨으로써 가야는 해상 교역의 이익을 대폭 상실하게 되었다. 둘째, 백제는 바다를 통하여 왜와 교역하기 어려워졌다. 즉 가야 지역을 중개 기지로 하던 대왜 교역 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편 신라는 가야와 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나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신라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셋째, 김해의 가락국이 쇠퇴한 대신에 경상도 내륙 지역의 가야 제국과 왜가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전기 가야 문화의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구의 주민들이 흩어져 경상남도 내륙 지역과 일본 열도 등으로 이주하면서 제철 및 철기 가공 기술, 도질 토기 제조 기술 등이 전파되었던 결과이다. 넷째, 가야 지역 내에서는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서 함안의 아라가야와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 세력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가야 제국 내에서 가락국이 쇠퇴하고 아라가야와 대가야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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