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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1394
한자 伴鷗亭
영어공식명칭 Bangujeong Pavilion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암4길 116-2[장암리 33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대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이전 시기/일시 1858년 5월 - 반구정 이전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27년 5월 - 반구정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0년 2월 - 반구정 중수
현 소재지 반구정 -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암4길 116-2[장암리 333]지도보기
성격 정자
양식 목조 기와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조성도
관리자 조성도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개설]

반구정(伴鷗亭)은 조선 중기 학자 조방(趙垹)[1557~1638]이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조방의 자는 극정(克精), 호는 두암(斗巖)·반구정(伴鷗亭)이다. 조방은 함안 출생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현손이며, 이황(李滉)의 『성학 십도(聖學十圖)』를 연구하였고 도학(道學)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창의하여 정암진(鼎巖津)과 기강(岐江) 등을 지키는 등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 산성(火旺山城)의진(義陣)에서 군무를 도와 많은 적을 무찔러 고을 사림들이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조정에 상소하여 포창(褒彰)을 청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낙동강 우포(藕浦)의 말 바위[斗巖] 위에 반구정을 짓고 마주 바라보이는 곽재우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오가며 산수의 자연과 함께 은둔생활을 하였다. 또한 『용화 산하 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에 1607년(선조 40) 초봄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 도내 선비 35명과 함께 용화산(龍華山) 아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방은 충효 사상을 일생의 신조로 삼았으며 『두암집(斗巖集)』 3권과 『가훈 팔잠(家訓八箴)』, 『충효 실감(忠孝實鑑)』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위치]

대산면 사무소를 지나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입사 마을 안쪽 경사가 심한 임도를 따라 3㎞ 정도 올라가면 용화산 기슭 입구를 알리는 바위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서 50m를 내려가면 낙동강 변 평탄한 자리에 반구정이 위치한다.

[변천]

반구정은 정유재란 이후 조방낙동강 변 말 바위 위에 세웠다. 그 후 반구정 주위가 침식되자 후손들이 1858년 5월 옛 청송사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 반구정을 옮겨 세웠다. 1929년 5월과 1980년 2월 중수되었으며, 1998년부터 2002년에 걸처 진입로 개설과 전기 공사를 하였다.

[형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평면 구성은 좌측에 2칸은 대청마루, 우측 2칸은 온돌방으로 구성하여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전면에는 알루미늄 새시 문을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 위에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고, 각 칸마다 화강석 장대석을 디딤돌로 놓았다. 초석은 원형으로 가공하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소로 수장으로 소박하게 장식하였다. 지붕 처마 끝은 막새 기와로 마감하였다.

[현황]

반구정은 용화산이 좌우로 감싸 안고 있다. 옮겨 지은 후 묘사 재실(墓祀齋室)[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마련한 집]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현재 반구정 좌측에는 조방의 후손인 조성도가 반구정 옆에 관리동을 건립하여 살고 있으며, 뒤쪽에는 공중화장실이 있다. 마당 앞 강변에는 65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으며, 넓은 마당 주변은 낮은 담장으로 구획하였다. 느티나무 앞 육각정에는 2007년 함안군 대산면에서 지어 준 호기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반구정과 인접하여 합강정(合江亭)이 위치한다.

[의의와 평가]

반구정은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일반적인 건축 형식이나 주변의 정자 건물들과 인물의 역사성 등 자연 경관을 고려한 정자 건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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