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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24
한자 安知鎬
영어공식명칭 An Jih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산서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5년 9월 21일연표보기 - 안지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얼 19일 - 안지호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21년 12월 23일연표보기 - 안지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안지호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얼 19일 - 안지호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산서리
묘소 안지호 묘소 -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
성격 독립운동가|교육자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안교준(安敎俊)이고, 아들은 안승문(安承文), 손자는 안량식(安良植), 증손자는 안희주(安熙周)·안희상(安熙商)·안희원(安熙元)이다.

[활동 사항]

안지호(安知鎬)[1875~1921]는 1875년 9월 21일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으나 함안군 가야읍 산서리에서 생활하였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여 서당의 선생으로 일하였다. 1913년 여름 경상남도 지사에게 도내의 정치가 부패하였으니 시정을 요구한다는 건의서를 보냈다. 1917년 12월에는 함안 경찰 주재소의 유리창을 깨고 ‘일본은 도적의 마음으로 백성을 포악하게 다스린다’는 글을 써서 넣었다가 구속되기도 하였다. 조선 총독부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여 징역 3개월 형을 선고 받고 집행 유예로 풀려난 일도 있다.

안지호함안읍 만세 운동의 실질적 지도자 이희석(李喜錫)과 의거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9일 함안 시장에서 태극기와 대한 독립가를 휴대하고 있던 것이 순사에게 발각되어 주재소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날 오후에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안지호를 탈출시켰다. 오후 5시 40분경 일본군이 출동하였을 때 안지호는 다시 주동자로 검거되었다. 당시 62세이었다.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순사 부장 오하야시[大林] 등의 증언으로 안지호는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안지호 외 10명이 대구 복심 법원에 항소하였는데, 안지호에게만 형을 더하여 7년 형을 확정하였다. 안지호는 대구 형무소에 수감될 때 죄수복 입기를 거부하여 알몸으로 감방에 들어가는 등 형무소에서도 일본에 대한 저항 정신이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일화도 있다.

마산 형무소로 이감된 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간수가 보석을 조건으로 자백서를 쓰게 하자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자백서를 쓰라고 하느냐?”라며 종이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21년 12월 23일 옥중에서 순국하자 성금을 모아 예전에 살았던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석림산에 장례를 치렀다. 시신을 운구할 때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곡을 하였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함안군 대산면 옥렬리석림산에 조성되었고, 광복 이후 함안 군수 전병출과 군민이 묘역을 고치고 비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1925년 10월 전국의 유림 향약 본부에서 표창 완의문(表彰完義文)을 올렸고, 정부에서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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