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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계몽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299
한자 愛國 啓蒙 運動
영어공식명칭 The Patriotic Enlighten Campaig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양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대한 협회 함안 지회가 설립되면서 함안 지역에서 애국 계몽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3월 - 영남 지역의 지역 단체 교남 교육회 설립
성격 계몽 운동
관련 인물/단체 대한 협회|교남 교육회|이연건

[정의]

1905~1910년 함안 지역에서 일어난 국권 회복 운동.

[개설]

애국 계몽 운동은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乙巳條約)에 의하여 국권이 박탈되고 일제의 식민지화가 노골화 되는 시점에서 전개된 국권 회복 운동이다. 함안 지역에서는 대한 협회(大韓協會) 지부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인 애국 계몽 운동이 활성화 된 이유는 계몽 사상가들이 속한 단체들의 활성화와 관련되어 있다. 1906년(고종 43) 4월에 설립된 대한 자강회(大韓自強會)와 대한 자강회의 해산 이후 1907년(순종 1) 11월에 설립된 대한 협회, 그리고 실질적 계몽 운동을 주도하였던 신민회(新民會)가 1907년 4월에 설립되었다. 각 단체는 전국적 단위로 활동하기 위해 각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고자 하였고, 이 시기 함안 지역에도 대한 협회 지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경과]

대한 협회 함안 지회가 정확하게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한 협회 회보』 11호에 실린 것으로 볼 때, 1909년(순종 3) 1월에서 2월 사이에 설립되어 조직을 구성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 협회 함안 지회의 설립은 함안 지역에서도 뒤늦게나마 애국 계몽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 계몽 운동을 전국적 단위로 활성화시킨 것은 애국 계몽 학회였다. 애국 계몽 학회는 1906년 10월 서우 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 학회(漢北興學會)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학회가 설립되었다.

영남 교남 교육회(嶠南敎育會)[혹은 교남 학회]는 박정동의 발기로 1908년(순종 2) 3월 15일 창립되었다. 교남 교육회가 창립하기에 앞서 1908년 1월 서우 학회가 강제 해산 당하였다. 나아가 통감부(統監府)는 국권 회복 운동과 국체 보상 운동을 주도해 온 애국 계몽 단체를 탄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학회령을 선포하여 모든 학회는 학부대신(學部大臣)의 승인을 받도록 조처하였다. 이 시기 학회령에 의해 조직된 단체가 바로 교남 교육회였다.

교남 교육회는 원래 경상도 지방의 교육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먼저 서울에 사범 학교를 설립한 뒤, 경상도에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로 활동 방향을 정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민족 교육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학교 설립은 지지부진하였다. 다만, 기관지인 『교남 교육회 잡지』를 통권 12호까지 발행하는 데 그쳤다. 당시 일제는 우리 민족의 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금지하기 위한 사전 조처로 각종 단체를 해산시켰으며, 『교남 교육회 잡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산되었다.

[결과]

함안 지역에서 애국 계몽 운동대한 협회 함안 지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교남 교육회는 안동군과 거제군 두 개 지역에만 설립되었고 직접적으로 함안 지부를 두고 있지는 않았으며, 교남 교육회의 구체적 활동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함안 지역 인사들이 교남 교육회에 대거 참가한 것으로 보아 애국 계몽 운동과 함안 지역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계몽 운동의 전국적인 활성화를 이루게 해 준 것이 전국 각지에 설립된 애국 계몽 학회였다. 애국 계몽 학회는 단순한 교육 단체가 아니라, 정치 운동과 같은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영남 지역의 교남 교육회는 타 지방보다 조금 더 늦은 시기에 설립되었으며 이는 영남 지역의 지역적 보수성에 기인한다. 즉, 조선 유학의 중심지로서 개화사상을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 대한 협회 함안 지회가 결성되었고, 교남 교육회의 내부 인사들 중 상당수가 함안 인사들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애국 계몽 운동이 함안 지역 내에 어느 정도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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