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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240
한자 安羅國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안홍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비정 지역 안라국 - 경상남도 함안군
성격 고대 국가
관련 문헌 『일본서기(日本書紀)』|『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던 가야 시기 고대 국가.

[개설]

안라국(安羅國)은 변진 안야국에서 발전한 가야 시기 함안 지역 고대 국가로 광개토대왕 비문과 『일본서기(日本書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유력 정치 집단이었다.

[명칭 유래]

『일본서기』에 언급된 가야 시기 13개국 명칭 가운데 안라(安羅)가 나오고,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안라'가 새겨져 있다.

[형성 및 변천]

삼한 시기 교역 등을 통해 성장하던 안야국(安邪國)은 3세기 말 발생한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과 400년 고구려광개토대왕의 남정을 통한 영역 확대로 안라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5세기 안라국의 발전은 기록으로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함안 말이산 고분군과 당시 전형적인 함안 토기 유형인 화염문 투창 토기의 분포를 보아서 안라국의 영역이 5세기에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역 확대는 안라국의 정치적 발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5세기 이후 안라국의 정치적 성장을 보여 주는 근거는 『일본서기』의 계체기(繼體紀)와 흠명기(繼體紀)의 기록이다. 안라국의 최고 지배자를 '왕·국주'라 기록하고 있어 당시 안라국의 왕권 성립을 보여 준다. 또한 이와 함께 '차한기·하한기' 등의 지배층이 기록되어 있는데, 족장을 의미하는 '한기'에 '차 혹은 하'라는 글자를 붙임으로써 왕이나 국주가 아닌 그 아래에 '차'·'하'로 분리된 '한기'라 불리는 지배 계급이 존재하였음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이는 당시 안라국에 왕 아래 '한기'라는 지배층이 있었고, 이 지배층이 '차' 또는 '하' 등으로 분화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은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영토 확장으로 안라국에 편입된 지역의 수장층으로 추정되는 '대인'이라는 계급도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지배 계층의 분화는 새롭게 편입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대가야처럼 '현'과 같은 지방 제도를 시행하였음을 가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왕권 확립, 지배 계층의 분화 등은 안라국이 하나의 고대 국가로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고대 국가로서의 안라국의 발전은 6세기 대외 활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529년 안라에서 개최된 안라 고당 회의(安羅高堂會議)는 안라국이 가야 제국을 백제와 신라로부터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었다. 물론 회의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안라국의 존재를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백제성왕의 요구에 의해 개최된 541년과 544년의 사비 회의에서도 안라국은 가야 제국을 대표하여 회의에 참여하였고, 회의 과정에서 가야 제국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은 계속되었고, 결국 안라국을 비롯한 가야 제국은 신라의 진출을 막기 위해 백제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백제와 신라의 전쟁인 554년 관산성 전투에 안라국과 가야 제국은 백제 편에서 싸웠지만 패배하였다. 관산성 전투를 계기로 가야 제국은 신라의 영역으로 복속되어 갔다. 안라국의 멸망 과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60년경 신라에 복속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안라국의 영역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안라국의 대표적 토기인 화염문 투창 고배의 분포, 현재 함안 지역에 남아 있는 산성 등을 통해 대강을 추정할 수 있다. 안라국의 최고 전성기의 영역은 지금의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마산 현동 지역, 의령 일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관련 기록]

광개토대왕릉비에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이 신□성, 염성을 공략하니 왜구가 크게 무너지고 성안의 십 중의 구가 왜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니 안라인 수병이…… 나머지 왜가 역시 안라인 수병에 따랐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 흠명기 9년[548] 기사에는 "마진성 전투에서 한 포로가 이르기를 '안라국과 일본부가 고구려에 와서 백제를 벌주기를 권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그럴 듯합니다"라는 기록과 『일본서기』 계체기 23년[531] 기사인 "안라는 새로이 고당을 짓고 칙사를 인도하여 올라가는데 국주는 뒤따라 고당에 올라갔고 국내의 대인으로서 미리 당에 오른 사람은 하나둘이었으며 백제 장군 등은 고당 아래에 있었다"라는 기사를 비롯하여 안라국과 관련된 여러 기사들이 적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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